아, 그 사람이다. 우미는 한산한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어서 오세요.'하고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하고는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설마 오늘도 그걸 사러 온 걸까? 오늘이야말로 다른 목적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우미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남자는 잡지 판매대, 생필품, 과자 코너, 심지어 도시락 코너마저도 지나쳤다. 목적지...
1월 24일, 오늘도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다 귀가해서 하는 일 없이 방에서 뒹굴뒹굴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토요일이었다. ……특별한 한 사람만을 위한 노래, ‘별은 빛나건만’ 벨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급히 목을 가다듬으면서 액정에 표시된 글자를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카나자와다. 갑자...
개학해서인지, 아니면 무언가 연주회 일정이 생긴 것인지 몰라도 요즘 들어 크리스마스 연주회 때의 주역들이었던 아이들이 거리에서 다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오늘의 앙상블은 당장 무대 위에서 연주해도 문제없을 것 같은 완성도였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의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에 공연히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가볍게 산책을 하며 모토마치 ...
결국 내가 완전히 쌩쌩해진 건 수요일이나 되어서였다. 몸살은 빨리 나았지만 감기 기운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전화가 늦어서 걱정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짓으로 다 나았다고 전화할 수는 없었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회복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대망의 수요일 저녁, 집에 돌아와 깨끗하게 씻은 후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한 자세로 통화할 준비를 하...
동경하던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기는 했을지언정 전화를 걸 용건도 용기도 없이 며칠간은 잔잔하고 즐거운 날들이 흘러갔다. 언제 어디에서 마주쳐도 괜찮도록 옷을 새로 사 입기도 하고 세이소 고등학교가 어떤 곳인지 슬며시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뿐만 아니라 우연히 출근길 건널목에서 만나 구둣발로 뛰는 나를 보며 그 사람이 소리 없이 웃어주거나 퇴근하던 도중에...
“그 시절에는 노래하는 것이 즐거워서 어쩔 줄 몰랐어. 평생 노래로 먹고살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결국 그리 되진 않았다.” “…….” “이탈리아에서 나는, 열렬한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좋을 만큼 말이야. 그런데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전부 끝나 있었다. 사랑도, 건강도, 성악가로서의 명성도. 쓰러질 때까...
한국에 돌아와서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안내 책자를 소중히 보관해 놓고 고모께 부탁해서 그 사람이 공연한 오페라의 비디오와 테이프를 수집해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갑자기 고등학교의 합창부에까지 들어갔다. 부모님은 처음엔 나의 기이한 행동을 보며 기가 막혀 혼내셨지만, 나중에는 반쯤 포기 상태에 돌입하셨다. 그러나 어느 순간, 비디오 입수가 뚝 끊...
아카렌가 창고에서 나를 도와준 그 사람이 만약 짐작하는 것과 같은 인물이라면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이탈리아에서였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나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있는 고모 댁에 신세를 지며 유럽의 많은 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셨던 고모부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지친 나에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음악을 들으며 쉬...
커다란 관람차와 기분 좋은 바닷바람, 개항도시 특유의 이국적인 풍경…지난 가을부터 정든 고국을 떠나 신세를 지게 된 이 요코하마라는 도시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어느 지역보다 음악이 친숙하다는 점이었다. 듣자 하니 음악으로 유명한 사립고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타지에서 홀로 보내게 된 크리스마스이브,...
어느 휴일, 한 남녀가 소파에 몸을 묻은 채로 말끔한 흑백의 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들의 입처럼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는 먹구름 가득 낀 잿빛 하늘이 보였고, 방 안은 연신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묻어 버리듯 잔잔하게 클래식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악장 하나가 끝났는지 잠시간 소리가 멈추었고 그 때 남...
똑, 똑. 망설이는 듯 들린 노크소리에 우리 둘의 시선은 동시에 문 쪽을 향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이 내 키 남짓인 걸로 봐선 아마도 여학생일 것이다. 당황해서 나가려 하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괜찮다고 저지시킨 그는 ‘열려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학생이 바이올린을 소중한 듯 껴안고 준비실로 들어오려다 나를 발견했는지 상체까...
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단순히 보고 싶다는 이유로 무작정 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교복을 입고 아기새처럼 방싯거리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볼 여학생들과 경쟁할 만큼의 배짱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획책하고 서로 복잡한 말로 꼬아 말하는 어른의 술책이 익숙해져버린 탓도 있을 터였다.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무심결에 한...
드림러. 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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